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

누가 복음 9장 57-62                       예수님은 따른 다른 것은…

예수님은 요즘의 지역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와 같이  일정한 장소에 장기적으로 머무시며 사역을 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시며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의 사역을 마치시고 이제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길은 가시는 도중에 만나게 된 세 사람과의 대화의 모습이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볼 누가 복음 9장 57-62의 내용입니다.   이 대화를 통해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57절에 나오는 첫 번째의 사람  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누가 복음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어떤 사람 (certain man) 이라고만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병행 구절인 마태 복음 8:18-22에서는 그가 율법학자였다고 말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따라가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이 한 말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은 그의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국 선한 목자 교회를 섬기시다가 은퇴하신   유기성 목사님 이라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이   한국의  장로 교단의 한 신학대학원 학생들을 위한 수련회를 인도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학 대학원 졸업반 전도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금지곡 같은 찬송이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 찬송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 있으신지요?   아니면 혹   짐작이 가는 것이라고 있으십니까?  유기성목사님에 따르면 그 것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라는 제목의 찬송가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찬송의 가사가  한 번 살펴보십시오.  

이 찬송가의 가사에는  바로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사람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 신학 대학원에 와서 이제 공부를 마치고 하나님이 인도 하시는 사역지로 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전도사들에게 있어서도 가긴 가야 하겠지만 아골 골짝 빈들이나, 소돔 같은 거리는 너무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멸시 천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는 것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  찬송가의 고백은 부담스럽고 그래서 이 찬송가는 가능하면 안 부르고 싶어한다는  이야기 였습니다.   저에게는 이 이야기가 그냥 농담이나 유머로 생각하며 웃고 넘어가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도  이런 찬송가의 고백은 부담스러워서 피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가?  하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이나, 신학생들의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아무런 조건을 붙이지 않고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쉽지 않은 고백을 하고  있는 이 사람, 칭찬 받아야 할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 그래  너의  믿음 너의 헌신 너무 귀하고 고맙다. ”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58절에서 갑자기 여우의 굴, 새들의 보금자리 이야기를 하십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런 동물에게도 최소한 피하고 쉴 수 있고 보호가 될 수 있는 굴도 있고 둥지도 있는데 내게는 몸하나 편히 누일 공간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 곳을 이동하시며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에게 최고급 5 star hotel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도로 옆에 허름한 motel이라고 제공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여우나 새들 에게도 주어지는 그런 최소한의 평범한 안식처도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그 말을 하고 있는 이 사람이 그 자신이 말하고 있는 그  “어디든지 따름이라고” 하는 말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 사람에게 네가 방금한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이런 것이 포함됨을  깨우쳐 주신 것이라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 사랑합니다.  이제 어디든지 당신을 따르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고백 자체는 귀한 것이지만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백안에 포함 돼있는  깊은 의미를  잘 모르고 그렇게 말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이 세상적 편안함으로, 안락함으로의  초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삶에는 불편함을 감당해야하는 책임이 주어진다는 것 우리가 알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불편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이 사실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따라 가려는 내게 왜 이렇게 불편한 것이 많은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 신지요?  여러분도 저와 비슷한 생각하실 때가 있으신 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세상의 편안함이 아니라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리스도의 평안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 다면 그 가운데 지불해야할 대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혹 여러분의 삶이 너무 편안 하기만 하다면 어쩌면 예수님을 전심으로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사도 바울도 로마서 8장 17-18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그 분과 더 불어 고난도 받아야 하고 그럴 때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성도들이 경험하는 현재의 불편함은 영원에 비하면 일시적이고, 고난은 앞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이어서 59절에서 이번 에는 예수님이 또 다른 어떤 사람을 향해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어떤 사람을 마태는 제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기록합니다(마태 8:21).   그러니까  이 사람도 상당히 진지하게  예수님을 따르길  원하는 마음을 가졌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님 잠깐 만이요  제가 먼저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루고 와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허락해 주십시오. 이렇게 요청합니다.   이 요청을 들으신 예수님은 60절에서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묻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이해가 안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또 다른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신적으로 죽은 사람을  장사 하게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명령입니다.  여러분 이 예수님의 말씀 어떻게 생각합니까?   너무 심한 말씀 같지 않습니까?  다른 일도 아니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일을 하지 말라 하신 것은 지나친 말씀이 아닙니까?  평소에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을 꾸중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태도 와도 일치하지 않은 말씀 같습니다(마태 15:1-9).   더욱이 유대인 전통 가운데 자녀가 죽은 부모를 장사하는 것은 자녀가 해야 할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유대인이셨던 예수님이 이 것을 모르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여기서 이런 심한 표현을 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것은 “먼저”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살펴 보아야합니다.  이 사람 생각하던 먼저 해야 할  일과 예수님의 마음에 있는 먼저 해야 할 일이 동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것 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우선 순위의 문제입니다.   우리도 이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지금 저에게는  아주 급한 결혼 문제가 있고 , 학위를 마치는 문제도 있고 , 직장 문제도, 사업의 문제도  있으니 그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그 때  주님 잘 따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면 안될까요? 하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따르지 않는 다는 이야기는 아닌데 지금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중요하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그 자리는 다른 어떤 것들이 차지하고 있기에 하나님은 이등이나 삼등이신 그런 모습으로 살지 말 것을 명령하신 것 입니다.

61절에서는 또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도 주를 따르겠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습니다.    그 것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는 하고 오겠다는  요청입니다.  나름대로 이유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앞에 사람과 동일한  이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것은 자신 말 한대로 따르긴  하겠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순위가 주님의  우선 순위가 아니라 내가 정한 우선 순위입니다.  주체가 나입니다주님이 나의 우선 순위의 주인이 아니십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 같이 소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빠지기 쉬운 오류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일들은 명백한 도적적 윤리적 법적 죄악은 아니기에 금방 눈에 뜨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또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긴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우리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녀로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것, 가족의 일원으로서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것은 좋은 일입니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지요.  그러나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을 방해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혹시 좋은 것을 하기에 바빠 가장 좋은 것을 놓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 이 제 예수님은 62절 말씀에서 이 모든 대화를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농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실감나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텃밭을 가지고 계신 분들을  이해하기가 쉬우실 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한 농부 앞에 씨를 뿌려야 할 넓은 밭이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그 밭에 씨앗을 뿌리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것은  씨를 뿌릴 땅을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굳어진 땅을 잘 갈아서 부드럽게 하고 섞여 있는 돌들도 골라내고  흙을 뒤엎어서 영양분을  많이 포함한  흙이 위쪽으로 옮겨지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땅에  뿌려진  씨앗이 뿌리를 잘 내리고 자랄 수 있는 밭이 준비됩니다.  그 다음에 씨를 뿌리면 그 땅에서는 좋은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게 됩니다.   그 일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도구가 쟁기입니다.  농부가  쟁기를  갈아야 할 방향을 향해  놓고  잘 붙들고  앞으로 자신이 밀거나 소가  끌게 하면  땅이 뒤엎어져 새로운 씨앗을 뿌릴 수 있는 준비된 토양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농부의 경우는  쟁기를 잡긴 했지만 갈아야 할 방향을 바라보지 않고  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밭은 갈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이렇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데 서만  그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그 방향을 향해  순종하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방향은 어디 입니까?  바로 예수님 이시고 하나님 나라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를 그 분을 따르는 제자로 부르신 것이지 구경꾼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또 그  따라 감에는 지불해야할 대가가 (cost)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 안에는 불편과 희생이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따른다는 것은 여유가 있을 때, 내 할 일이 다  마무리 되었을 때,  시간 있을 때, 내 기분이 좋을 때 하는 취미생활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따른다는 것은 나의 우선 순위가 아니라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우선 순위를 따라 그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말은 하면서도 자주 뒤를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집중하고 순종하는  우리가 되어야합니다.  

유목 민족인 몽골 사람들의 그들의  왕을 위한 말을 선택하는 과정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 가지고 있는 말 중에서  가장 탁월해 말들을 선택해서 경험 있는 조련사가 왕의 좋은 말이 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훈련을 시킵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되면 그 말들에게 마지막 테스트가 주어집니다.   오래 동안 물을 먹지 못해 매우 목마른 말들을 물가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는 물을 마시지 말고 기다리라고 명합니다.  목마른 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순간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의 우선 순위는  갈증을 해소할  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련사는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이해 잘 안됩니다.  대부분의 말을 이 테스트에서 실패한다고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기다리라는 조련사의 말을 무시하고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소수의 한 두 말만이 끝까지 그 명령에 순종하는데  그런 말을 향해 조련사는 Fit of the king 이라고 선언한다고 합니다.  너는 왕에게 합당한 말이라는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왕을 태우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단 한 번의 인생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 인생 가운데서,  여러분 모두가 너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인정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 것 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이 있을 까요?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인정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 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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